2013년 1월 31일 목요일

♡♥♡당신이 있어 행복합니다 ㅇ ㅓㅁ ㅓㄴ ㅣ






수필집 "당신이 있어 행복합니다. 어머니!"


이책을 읽다 보면 크게 세 시선(視線)과 마주하게 됩니다.

자녀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엄마의 시선,

자녀에게 더 주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아버지의 시선, 


지난날 부모님께 잘못했던 일을 돌아보며 뉘우치는 자녀의 시선입니다.



각기 다른 위치에서 서로를 바라보지만 '사랑'의 마음은 매한가지입니다.


글을 읽으며 순간순간 이렇게 말고 싶을 것입니다.

"당신이 있어 행복합니다. 어머니!"

하나님의교회 어머니하나님을 사랑하는 엘로히스트라면 눈물없이는 볼 수 없을겁니다...










시온?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집?



시 132:13~14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이는 나의 영원히 쉴 곳
이라 내가 여기 거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

시 133: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
로다


사 33:20~21
우리의 절기 지키는 시온성을 보라 네 눈에 안정한 처소된 예루살렘이 보이리니...
여호와께서는 거기서 위엄 중에 우리와 함께 계시리니...

사 33:24
그 거민은 내가 병들었노라 하지 아니할 것이라 거기 거하는 백성이 사죄함을 받으리라.

하나님의 절기를 지키는 시온은 오직 하나님의 교회 뿐입니다~!


                       절기와 절기 가운데 담아 놓으신 구속의 경륜                                    






2013년 1월 30일 수요일

안상홍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실 약속










왕의 말이 곧 법이었던 왕조시대에 한 사형수가 형장으로 끌려왔습니다.왕의 앞에 선 죄인은 사시나무 떨듯이 떨며 소원으로 물 한 사발을 요구했습니다.그러나 그는 제대로 물을 마시지 못하고 손발을 연신 떨고만 있었습니다.임금은 말했습니다.


" 그 물을 다 마시기 전에는 절대 죽이지 않을 터이니 마음 놓고 물을 마시라."


그 순간 사형수의 손에 든 물 그릇이 땅에 떨어져 깨어지고 물은 바닥에 쏟아져 버렸습니다.임금은 진노하였지만 이내 쓴웃음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사형수를 살려주라고 명하였습니다.바로 좀 전에 사형수와 했던 약속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이 사형수와 같은 입장입니다.
그런 저에게 영생을 주시겠다고 하늘의 왕이신 안상홍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 약속이 지켜질것을 믿게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2013년 1월 29일 화요일

무엇이 궁금하십니까?『하나님의교회 관련 괴담들?』


그 많은 괴담을 누가 다 퍼뜨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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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민습 중에 감추고 싶은 게 하나 있다. 고려장이다. 늙은 부모를 산속에 내다버리는, 엽기적인 행각을 우리네 조상들이 했단다. ‘효’를 대대손손 가장 큰 덕목으로 교훈하는 우리 조상들이 말이다.
고려시대 선조들이 실제 그랬을 거라고 믿는가? 교과서에까지 버젓이 실려 있는 역사인 걸 어찌 거짓말이라고 여기랴. 그런데 거짓말이다. 역사학자들에 의하면 진상은 이렇다.
고려시대 문헌 그 어디에도 ‘고려장’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장례문화 중 일부 하위계층은 ‘시체’를 산에 방치하는 ‘풍장’이 존재했다. ‘산 사람’을 버리는 고려장과는 차원이 다르다.
고려장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건 19세기 말 도쿄대 미국인 교수 윌리엄 그리피스가 쓴 ‘은둔의 나라 한국’에서다. 이상한 점은 고려장에 대해 쓰면서 출처를 밝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려장뿐만이 아니다. 그 책에 소개된 한국은 아주 ‘이상한 나라’다. 한국인들이 식사 중에 말을 하지 않는 이유가 음식을 더 많이 먹기 위해 입을 딴 데 쓰면 안 되기 때문이란다.
더 이상한 점은 윌리엄 그리피스는 단 한 번도 한국을 방문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한국에 대한 정보는 그저 사람들에게 들은 것이 전부다. 이후 ‘고려장’에 대한 이야기가 속속 등장하기 시작한 건 일제강점기다. 일본인이 쓴 ‘전설의 조선’,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동화집’ 등에 고려장이 소개됐다. 어째서 일본은 한국을 배은망덕한 불효자가 사는 이상한 나라로 만든 것일까?
인하대 최인학 교수는 말한다. “우리나라의 무덤을 도굴하기 위한 일본의 꼼수였다”고. 과거 선조들은 묘를 만들 때 고인이 자주 쓰던 물건을 함께 묻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던 일본이 무덤을 파헤치려고 했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조상의 묘를 함부로 다루는 걸 꺼려하자, 그 같은 꼼수를 부린 것이다. 그렇게 제 부모를 내다 버린 못된 놈이 묻힌 무덤은 일본인들에 의해 공공연히 파헤쳐졌고, 우리는 문화유산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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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담은 이렇게 생겨난다. 그리고 실제 이야기인 것처럼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된다. 초등학생 시절, 나는 故 전 김대중 대통령이 빨갱이인 줄 알았다. 호적에 잉크도 안 마른 주제에 어른들이 하는 말을 주워듣고 편협한 생각에 빠진 것이다. 호적에 잉크가 마르고 진실을 깨달은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괴담에 깜빡 속은 내 죄인 걸 누굴 탓하랴. 여전히 세간에는 많은 괴담들이 떠돈다. 요즘 들어선 인터넷과 SNS를 통해 더욱 빠르게 확산된다.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이 그걸 믿는단다.



현택수 고려대 사회학 교수는 괴담이 생기는 현상에 대해 이렇게 진단했다. “괴담은 공식 정보보다 형식적인 측면에서 간단하고 단정적 문구가 많으며, 편향적이며 감정을 자극하는 선동적 내용이 많다. 그리고 괴담의 형성과 전파 과정에는 사실과 비교 정보는 적고, 토론과 논쟁이 없는 일방적 정보유통만이 있다. 이 때문에 괴담은 종종 어떤 사회현상과 정책에 대해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이 대중조작의 불순한 의도에서 기획하고 유포하기도 한다.”



이런 형태로 시작된 괴담은 사람들이 믿든 안 믿든 당사자에게는 큰 고통을 준다. 괴담에 시달리던 한 가수는 수많은 취재진들 앞에서 허리띠를 풀면서까지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려고 했다. 괴담은 때론 살인을 부르기도 한다. 몇몇 연예인들은 치욕을 견디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버렸다.



불순한 의도에서 기획하고 유포된 괴담 때문에 하나님의교회 성도들도 심적 고통을 안고 산다. 불경스러운 호기심으로 하나님의교회를 쳐다보는 사람들은 떠도는 괴담을 곧이곧대로 믿는다.
 ‘하나님의교회는 이단이다’, ‘분당에 있는 하나님의교회 지하에는 사람이 감금돼 있다’, ‘하나님의교회에 발을 들여놓으면 빠져나오기 힘들다’, ‘연수원에서 집단자살 할 것이다’….



내가 다니는 하나님의교회에 대한 괴담들이다. 밑도 끝도 없는 말들에 개탄을 금치 못할 지경이다. 옛말에 ‘서울 가 본 놈하고 안 가 본 놈하고 싸우면 서울 안 가 본 놈이 이긴다’는 말이 있다. 하나님의교회에 대한 괴담들은 순전히 서울 안 가 본 놈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하나님의교회가 이단이면 성경을 가지고 비교해보면 될 일이다. 사람이 감금돼 있으면 지금 당장 경찰서에 신고할 일이다. 믿음이란 억지로 붙잡는다고 생기는 게 아니다. 안 다니고 싶다면 그래도 된다. 난 죽음이 두려웠던 사람이다. 간절히 삶을 소망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게 됐다.



그래도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다면 직접 정보를 캐라. 하나님의교회에 와서 확인해봐라. 무지함으로 인해 우리의 선조를 농락하고 문화유산을 빼앗겼던 슬픈 전철을 다시는 밟지 말아야 할 것 아닌가. 진실을 왜곡하는 괴담에 속지 마라.




 









2013년 1월 28일 월요일

하늘 가족의 대표, 아버지 하나님



대개는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요한복음 8:41)”,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에베소서 4:5~6)” 하신 말씀을 인용하며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말씀을 자세히 연구해보면 아버지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뜻이지, 하나님이 유일신이기 때문에 한 분만 존재한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이 한 분이시며 아버지 하나님은 유일하게 한 분이라는 말씀이다. 다른 어떤 신도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한 분뿐이라고 하신 것은 어머니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표현이 아니다. 오히려 어머니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반증이다.
 
하나님은 분명 두 분이신데, 성경은 왜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고 표현한 것일까. 이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갖고 계시는 대표성 때문이다.
 
예를 들면, 한 가정의 구성원으로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을지라도 가족의 대표인 아버지의 이름만 적어 문패를 거는 이치와 같다. 누구나 아버지의 이름이 갖는 대표성 때문에 그 집에 아버지 혼자만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당연히 어머니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하늘 가족에도 이처럼 대표자이신 아버지 하나님이 계시고 어머니 하나님이 계신다.
 
또 다른 예로, 아담과 하와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성경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고 기록되어 있다(로마서 5:12~19). , 아담 한 사람이 죄를 지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 먹고 죄를 지은 사람은 아담과 하와 두 사람이었다. 죄를 지은 사람이 두 사람인데도 한 사람이라고 표현한 것은 아담이 갖는 대표성 때문이다. 이를 두고 하와는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해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따라서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하신 말씀을 하나님은 한 분뿐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성경을 단편적으로만 이해하여 곡해한 것이다.

엘로힘, 성령과 신부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DRW00000934771c.bmp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28pixel, 세로 30pixel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께서 구원의 역사를 이끄시는 장면은 성경 전반에 걸쳐 담겨 있다. 다음은 성경 마지막 장에 묘사된 두 분의 구원자에 대한 기록이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요한계시록 22:17)
 
하나님께서 성령과 신부의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구원을 베푸신다는 예언이다. 성령은 아버지 하나님이다. 신부(bride)는 말 그대로 성령의 아내이니 어머니 하나님인 것이다. 다시 말해 성령과 신부는 창조 시에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하시며 인류를 창조하신 엘로힘, 즉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이다.
 
어머니 하나님께서는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시기 위해 마지막 성령시대에 이 땅에 오셨다. 잃어버린 자녀를 찾는 일은 아버지만의 몫은 아닐 것이다.




안증회가 종교 사기???



이단이라 불렸던 초대 하나님의교회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 일이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도를 전하던 사도 바울을 고소해 법정에 세웠다. 이단이란 이유에서다(사도행전 24:1~14).



어째서 사도 바울은 이단이란 오명을 쓰게 됐을까. 교권을 잡고 있던 유대교의 신앙(교리)과 많은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오직 영으로 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으며 사람으로서는 하나님을 제대로 볼 수조차 없다고 여겼다. 반면 사도 바울(초대 하나님의교회)은 육체로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전했다. 또한 모세를 통해 세웠던 옛 언약을 신앙의 중심에 뒀던 유대교와 달리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새 언약을 중심에 뒀다. 이같이 상반된 신앙의 차이로 유대교인들은 편견에 사로잡혀 사도 바울을 법정에 세우기에 이르렀다<표 참조>.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예수님)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로마서 9:5)



바울은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증거했다. 왜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증거했을까? 예수님께서 태어나기 700년 전 이사야가 기록한 예언에 그 근거가 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예수) 어깨에는 정사를 매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이사야 9:6)



이런 이유로 바울은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에 따라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 예수님을 믿었던 것이다. 아울러 예수님께서 세워주신 새 언약을 지키는 자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 근거로 하나님께서 옛 언약을 폐하고 새 언약을 세워주실 것이라고 예언한 예레미야 선지자의 기록이 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예레미야 31:31)



이는 옛 언약을 신앙의 중심으로 삼고 있던 유대교인들은 구원받을 수 없다는 의미다. 이 말씀을 듣고 수많은 사람들이 유대교를 떠나 하나님의교회로 몰려왔다. 유대교는 반발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예수님을 좇는 모든 하나님의 교회 교인들을 이단이란 죄명으로 잡아들이자는 것. 이런 이유로 사도 바울은 법정에서 이단이란 비난을 받았다.







마치 오늘날 하나님의교회와 기성교회를 보는 듯하지 않은가. 하나님의교회는 성경의 예언에 따라 육체로 오신 재림 그리스도 안상홍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을 구원자로 믿는다. 또한 하나님만이 세워주실 수 있는 새 언약을 지킨다. 이런 이유로 기성교회는 하나님의교회를 이단이라고 비난한다<표 참조>. 하지만 때가 되면 역사는 말해줄 것이다. 오늘날 사도 바울이 이단이 아닌 참 선지자라고 칭송을 받는 것처럼.


2013년 1월 27일 일요일

현대판 인신매매, 하나님의교회는?


현대판 인신매매, 당신이 팔리고 있다






현대판 인신매매다. 지나친 비약이라고 생각하는가? 결코 아니다. 누군가는 이 부동산 정보란을 보며 성도 한 명당 헌금을 계산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성도 급매합니다”란 말과 뭐가 다르겠는가.



종종 부동산 정보란에서 이런 광고를 보고 나면 내 일도 아닌데 씁쓸해진다. 그 안에 사람이 보이기 때문이다. 당사자도 인식하지 못한 채 자신이 누군가에게 흥정거리가 된다면, 그리고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떤 기분일까.



교회를 하루빨리 처분하고 싶은 심정은 그렇다 치자. 하지만 이건 아니다. 그동안 목사님 목사님 하며 따르던 성도들을, 좀 더 좋은 값 받겠다고 교회 건물에 끼워 파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고명하시다는 목사님들 눈에는 성도가 도대체 무엇으로 보이시는지.


그렇다면 하나님의교회는 어떠한가?

사도행전 20장 28절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마태복음 26장 26절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피값으로 사신 교회이므로 당신의 자녀를 당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십니다












2013년 1월 26일 토요일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정말인가..하나님의교회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무조건 구원받는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그 말이 정말인가요?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네 믿음대로 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비롯해, 사도 바울은 기독교 신앙의 3대 요소 중 하나로 꼽을 만큼 믿음을 강조하면서 “의인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했습니다(마 9장 29절, 고전 13장 13절).


롬 1장 17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갈 3장 11절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믿음은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믿음과 다릅니다. 대부분의 교회에서 예수님께서 ‘행하라’고 가르쳐주신 새 언약의 제도는 완전히 배제시킨 가운데 머릿속에 있는 생각만을 믿음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진정한 믿음이라 할 수 없습니다.



믿음과 행함은 한 몸


집에 온 손님이 식사 대접을 받고 “밥 잘 먹었습니다"라고 인사할 때, 그 말을 반찬없이 오로지 밥만 먹었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습니다. 비록 다른 단어가 언급되지 않았더라도 음식을 골고루 잘 먹었다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씀도 믿음이라는 단어만 보인다고 해서 믿는 마음 그 자체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라는 말 안에는 믿음에 따른 행위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히 11장 7~8절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성경에서는 노아가 방주를 짓고,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이동한 것이 모두 ‘믿음’으로 된 일이라고 말합니다. 한사코 믿음과 행함을 나누려 하는 사람들의 이분법적 주장대로라면 방주를 지은 것이나 가나안으로 이동한 것은 행함이지 결코 믿음이 아니라는, 성경과 배치되는 결론이 나오고 맙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행위가 수반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믿음으로 행해야 할 새 언약의 제도가 구원에 꼭 필요하다고 가르쳐주셨습니다.



믿음과 새 언약의 제도


막 16장 15~16절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침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복음을 믿기는 하되 침례를 받지 않으면 믿지 않는 사람과 다를 바 없습니다. 구원을 얻으려면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복음을 믿을 뿐만 아니라 ‘구원’의 표, 침례를 받아야 합니다.

벧전 3장 21절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침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믿기만 하면 무조건 구원받고 그 어떤 행위도 필요 없다는 주장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 곧 성경적인 믿음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 데서 생긴 잘못된 주장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말할 때 그 ‘믿음’이라는 말 속에는 ‘침례’라는 새 언약의 제도가 이미 포함되어 있습니다.

유월절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요 6장 53~54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결코 영생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죗값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인류에게 있어서 구원이란 곧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영생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사람에게만 허락하신다고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으니, 구원을 위해서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행위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는다면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하신 말씀대로 영생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큰 믿음이 있더라도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행위가 없다면 구원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방법, 그것이 바로 새 언약의 유월절입니다.


마 26장 17~28절 “무교절의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유월절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예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가라사대 성 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하신대 제자들이 예수의 시키신 대로 하여 유월절을 예비하였더라 …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눅 22장 14~20절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이 땅에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유월절 먹기를 간절히 원하고 원하셨습니다(눅 19장 10절, 요 10장 10절). 그만큼 새 언약 유월절을 지키는 것이 우리의 구원 곧 영생을 얻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유월절 떡과 포도주는 예수님의 살과 피


유월절 떡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살과 피를 의미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 속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에 대해 잘못된 인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이지 유월절 떡과 포도주는 영생과 무관하다는 억지 주장을 펴기도 합니다.

요 6장 47절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믿는 자가 영생을 얻느냐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심을 믿고 먹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요 6장 47~51절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생명의 떡임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기 위해 그 떡을 먹어야 합니다. 본문의 말씀은 믿는 것 자체가 생명의 떡으로 표상된 예수님을 먹는 것이 될 수 없으니 예수님께서 생명의 떡이심을 믿고, 먹으라는 뜻입니다. 영생을 주는 예수님의 살과 피가 바로 유월절의 떡과 포도주입니다. 그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더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을 통해 ‘죄 사함’을 약속하셨습니다(마 26장 27~28절).
성경에서 죄의 값은 사망이라고 하였으니, 죄 사함을 받게 되면 사망도 없어지게 됩니다(롬 6장 23절). 즉 영생하는 것입니다. 유월절 안에 담긴 축복이 요한복음 6장의 말씀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은 유월절의 떡과 포도주가 바로 ‘영생’을 얻게 하는 예수님의 살과 피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다른 증거는 예수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히 5장 8~10절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

멜기세덱은 구약시대, 아브라함에게 떡과 포도주로 축복을 빌어준 제사장입니다.

창 14장 18~19절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예수님께서 유월절 떡과 포도주로 죄 사함과 영생의 축복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예수님이 멜기세덱의 실체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떡과 포도주가 영생과 관계없다는 주장은 예수님께서 멜기세덱의 실체라는 사실을 간과한 어리석은 주장입니다.



행함의 중요성


구원에 있어서 믿음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진실로 믿어야 할 것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이지 인간이 만든 헛된 교리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믿고 침례를 받는 자가 구원을 얻는다고 말씀하셨고, 멜기세덱의 실체로서 유월절 떡과 포도주로 영생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는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믿음으로 침례와 새 언약의 유월절을 행해야 합니다.

행함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 유월절 본예배에 앞서 행하는 세족 예식 때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에서도 여실히 드러납니다. 베드로는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자신의 발을 씻지 못하게 막으려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 발을 씻지 않으면 당신과 아무 상관이 없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요 13장 8절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당시 베드로는 누구보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마 16장 16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구원자이신 예수님과 아무 상관없는 자가 구원받을 수는 없습니다. 이는 세족 예식을 포함하여 유월절 예식을 지키는 것이 그만큼 우리의 구원에 꼭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들어가는 천국


천국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들어가는 곳입니다.

마 7장 21절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입으로만 믿는다고 말하거나 믿는다는 생각만 가지고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분명 믿고 침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고 하셨고,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생명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 모든 말씀을 믿고 그대로 행하는 것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참된 믿음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요 하나님의 뜻입니다.



2013년 1월 25일 금요일

성령하나님..예수님의새이름...안상홍님~





성부, 성자, 성령, 성삼위는 한 분이시다. 이를 두고 성삼위일체(聖三位一體)라 한다. 

기독교의 기본적 교의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성삼위일체를 믿지 않고 있다. 그들이 믿는 것은 ‘오직 예수’뿐이다. 그들이 진정 성삼

위일체를 믿는다면 성경에 등장하는 새 이름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다. 



성삼위일체의 이해를 돕기 위해 ‘물’을 생각해 보자. 수소와 산소의 화학적 결합물인 

액체, 물은 0℃ 이하에서는 얼음이 되고 100℃ 이상에서는 수증기가 된다. 이렇게 물

은 얼음, 수증기처럼 모양과 이름이 달라도 그 분자인 H2O는 변함이 없다. 성분이 달

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성부 하나님이신 ‘여호와’께서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으로, 성령 하나님

이신 ‘예수님의 새 이름’으로 육체를 입고 나타나셨지만 그 근본은 하나님이시다. 각 

시대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다른 모습으로, 다른 이름을 가지고 오

셨을 뿐이다. 이런 사실을 믿는 것이 바로 성삼위일체에 대한 올바른 믿음이다. 



더 이상 ‘오직 예수’로는 구원이 없다. 지금은 성령시대이고 성령시대에 오신 하나님

이신 ‘예수님의 새 이름’을 믿어야 구원받을 수 있다.








2013년 1월 24일 목요일

모든 길은 새언약유월절로 통한다~!







천국을 목적 삼고 신앙을 하는 성도라면 반드시 지켜야할 중요한 규례가 하나님의교회 안상홍님께서 세워주신 새 언약 유월절입니다.  우리들이 지키고 있는 이 새언약유월절을 과연 누가 지키라고 명하셨을까요~?





 여기서 새언약유월절을 영원한 규레로 대대에 지키라고 명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구약에 유월절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제정하시고 지키라고 명하신 규례였습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유월절을 지킨 결과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신약시대에는 과연 누가 이 새언약유월절을 지키라고 명령 하셨는지 알아봅시다~





 신약시대에는 누가 새언약유월절을 지키라고 명하셨습니까?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신약시대에도 새언약유월절은 하나님께서 지키도록 명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신약에는 왜 새언약유월절을 지키라 명하셨을까요??
그것은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해방시켜 영생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무엇을 먹고 마셔야 영생을 주신다고 하였습니까? 예수님의 살과 피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는 자가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들이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는 어떻게 먹고 마실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새언약유월절을 준비하게 하고 지키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 떡을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내 몸 곧 예수님의 살이라고 하셨습니다. 유월절 포도주는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내 피 곧 예수님의 피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유월절을 지키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방법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무엇을 지켜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새언약유월절입니다.

 이렇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새언약유월절을 지키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그토록 영생을 주시려고 하셨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천국이 어떤 곳인가를 알면 그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천국은 다시는 사망이 없는 곳입니다. 언젠가는 죽을 존재들은 절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 주시기를 그토록 원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를 영생체로 만들어 천국에 데려가시고자 새언약유월절을 지키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새언약유월절  지키기를 거부하는 자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당연히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유월절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지키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구약에나 신약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유월절을 지키라고 명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새언약유월절을 지키는 것이 절대적인 안상홍하나님의 뜻입니다. 안상홍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새언약유월절  지키는 성도 들만 여원한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하나님께서 친히 명하시고 가르쳐주신 새언약유월절을 지키고 영생 얻어 영원한 천국으로 나아갑시다~~










사람은 왜 70년을 살까?...하나님의교회..



코끼리 평균수명 60세, 고래 120세, 바다거북 200세···. 그리고 성경에 기록된 사람의 평균수명 70~80세(시편 90:10). 이들의 수명이 각각 다른 이유는 뭘까.


모든 생명체는 난자와 정자가 만났을 때 비로소 탄생한다. 이 생명체에 영양을 공급하고 에너지를 만드는 데 필요한 것이 바로, 미토콘드리아라고 한다. 미토콘드리아는 몸의 가장 작은 단위인 세포가 움직이도록 에너지를 만드는 공장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미토콘드리아가 활동을 멈춘다는 것은 곧 생명체의 죽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신비로운 사실이 있다. 생명체 곧 우리 몸에 전달된 미토콘드리아가 전부 어머니의 미토콘드리아라는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아버지와 어머니의 유전자를 각각 동일하게 물려받는 것과 달리, 이 생명유전자인 미토콘드리아만큼은 오직 어머니의 것만을 유전받는다.


실제로 난자에는 30만 개의 미토콘드리아가 있으며 정자에는 유전정보가 담긴 머리와 헤엄칠 꼬리 사이에 고작 150개의 미토콘드리아가 있다. 그런데 난자와 정자가 결합하면서 정자가 가지고 들어온 미토콘드리아를 난자가 거부반응을 일으켜 송두리째 부숴버리게 된다. 결국 수정란 속에는 아버지의 미토콘드리아는 하나도 없고, 고스란히 어머니의 미토콘드리아만이 남게 된다. 어머니의 생명유전자만이 자녀에게 100% 전달되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생명체는 어머니를 통해 그 생명이 유전된다고 할 수 있다. 코끼리가 60년을 사는 것은 어미 코끼리에게 60년 살 수 있는 생명유전자를 받았기 때문이다. 또 고래가 120년을, 바다거북이 200년을 살 수 있는 것도 그 어미로부터 물려받은 생명유전자의 영향 때문이다. 물론 사람도 마찬가지다. 자녀가 70~80년을 사는 것은 생명유전자의 100% 제공자인 어머니가 70~80년 살 수 있는 생명유전자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염원하는 영원한 생명은 누구를 통해서 받을 수 있을까. 당연히 영원한 생명을 가지신 분을 통해 가능할 것이다. 그분이 바로 어머니 하나님이시다. 사도 바울은 “오직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하면서 성도들에게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고 설명했다. 여기서 형제들은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 곧 하늘 예루살렘 우리 어머니의 자녀다(갈라디아서 4:26~31). 하늘 어머니의 자녀들이 약속받은 것이 있다.


그(하나님)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요한일서 2:25)



출처 : 패스티브닷컴

일, 월, 화, 수, 목, 금, 토요일 새언약안식일에 예배하는 하나님의 교회








일, 월, 화, 수, 목, 금, 토.
하나님께서 지키라 하신 새언약안식일은 무슨 요일에 해당할까.
안식일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계명이다. 하나님께서는 한 주간의 끝날인 제칠일을 다른 날과 구별하셨다. 그리고 그날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고 명하셨다. 사람들도 일년 365일을 다 특별한 날로 기념하지는 않는다. 그중 아주 특별한 날들만 기억한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날로 정하신 날이 일곱째 날 새언약안식일이다.






새언약안식일이 요일상 ‘토요일’에 해당한다는 사실은 성경과 다양한 자료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성경을 통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성경버전인 개역한글에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이 ‘안식 후 첫날’ 즉 ‘안식일 이튿날(다음 날)’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구절을 공동번역에서는 “일요일 이른 아침,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뒤 ···”라고 번역하였다.



공동번역은 예수님의 행적에 대해 예수님의 공생애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고 후에 도입된 요일제도를 적용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번역한 것이다. ‘안식일 다음 날’을 가리켜 일요일이라고 하였으니, 그 전날인 안식일은 당연히 토요일이 되는 것이다.



달력을 보아도 일곱째 날이 토요일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요일순으로 이루어진 달력을 보면 첫째 날은 일요일이며, 일곱째 날은 토요일이다. 국어사전에도 일요일은 ‘칠요일의 첫째 날’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토요일은 ‘일요일로부터 일곱째 날, 주말(週末)’이라고 기록되어 있다(금성출판사, 국어사전 참고).



영어사전도 예외는 아니다. 영어사전은 ‘한 주 즉, 7일의 주기는 일요일을 시작으로 하여 토요일에 끝난다(Week: a 7-day cycle beginning on Sunday and ending on Saturday)’고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해 한 주의 시작은 일요일이고 마지막 날인 일곱째 날은 토요일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일요일은 일곱째 날이 아니라 ‘한 주의 첫날(sunday: the first day of the week)’, 토요일은 ‘한 주의 일곱째 날(Saturday: the seventh day of the week)’이라고 되어 있다(Merriam Webster’s Collegiate Dictionary 참고).



성경의 안식일이 토요일이라는 것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가톨릭에서도 인정한다. 다음은 가톨릭출판사에서 발행한 ‘무엇하는 사람들인가?’라는 책의 일부를 인용한 것이다. “’안식일(安息日)’은 쉬는 날이란 뜻인데, 하느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시고 쉬었던 마지막 날, 즉 토요일입니다. 그래서 요즈음도 일력표에 보면 토요일이 주말로 되어 있습니다.”



가톨릭출판사에서 발행한 또 다른 책 ‘억만인의 신앙’에도 안식일이 토요일임을 밝히고 있다. “’안식’이라는 말은 ‘쉰다’는 뜻이요, 주일의 일곱째 날 곧 토요일에 해당하는 날이다. ··· 그렇지만 성서에 일요일이 아니라 토요일로 명시되어 있으니 성교회로가 아니라 성서에서부터 직접 종교를 끌어 왔다고 우기는 가톨릭이 아닌 이들도 토요일 대신 일요일을 지키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정말 이치에 맞지 않는다.”



성경의 안식일은 일곱째 날로 요일상 토요일이다. 시대가 변한다 해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예배일은 바뀌지 않는다. 창조주의 기념일인 안식일은 창세 때부터 일곱째 날이었고, 구약시대에도, 2천 년 전에도 일곱째 날이었으며,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일곱째 날이다.











2013년 1월 23일 수요일

미스테리한 하나님의교회...수상하다...



죄를 지은 사람이 마음 놓고 도망할 수 있는 곳. 피하기만 하면 누구도 잡을 수 없는 곳.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들지만 실제로 그곳은 존재한다.


때는 AD 300년경 삼한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곳엔 죄인들을 위한 아주 특별한 장소가 있었다. 바로 ‘소도(蘇塗)’다. 소도는 국법의 힘이 미치지 못하여 죄인이 이곳으로 도망하더라도 그를 돌려보내거나 잡아갈 수 없었다. 그런데 소도와 같은 곳이 그보다 훨씬 이전에 존재했었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3500년 전이다. 성경은 이곳을 ‘도피성’이라 이름했다


너희를 위하여 성읍을 도피성으로 정하여 그릇 살인한 자로 그리로 피하게 하라 ··· 그는 거룩한 기름부음을 받은 대제사장의 죽기까지 거기 거할 것이니라 ··· 또 도피성의 피한 자를 대제사장의 죽기 전에는 속전을 받고 그의 땅으로 돌아가 거하게 하지 말 것이니라 (민수기 35:9~28)


BC 1500년경,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시고 실수로 살인한 자를 위해 도피성을 만들어 피난처를 제공하셨다.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아야 하는 엄격한 제도 안에서 실수로 살인한 자를 보호할 법적 도구가 필요했던 것이다(출애굽기 21:23~25).


여기서 주목할 점은 실수로 살인한 자들이 어떻게 도피성에서 나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느냐 하는 것이다. 죄의 형량에 따라 도피성에 갇혀 있거나 오늘날의 보석금과 같은 속전을 내는 것도 아니었다. 오직 ‘대제사장의 죽음’만이 감옥이나 다름없는 도피성에서, 그리고 죄에서 해방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대제사장의 죽음과 죄인들의 자유’. 이 미스터리한 법의 진실은 무엇인가.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히브리서 11:13~16)


성경은 본래 우리의 고향이 하늘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지구는 하늘에서 죄를 지은 죄인들이 모여 사는 감옥, 곧 영적 도피성인 것이다. 그렇다면 도피성에서 해방받는 방법은 무엇일까. 오직 대제사장의 죽음뿐이었으니, 죄인인 우리가 하늘 본향에 돌아가기 위해서는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의 죽으심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가 아들(예수)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 (히브리서 5:8~10)


구약시대 대제사장의 실체는 예수님이다. 대제사장이 죽어야 도피성의 죄인들이 해방되었던 역사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영적 도피성의 죄인들, 즉 지구에 사는 사람들이 해방될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영적 도피성에서 해방받아 영혼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유언으로 남겨주셨다.


제자들이 예수의 시키신 대로 하여 유월절을 예비하였더라 ···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태복음 26:19, 26~28)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의 거룩하신 희생이 담겨 있는 유월절만이 하늘 본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모든 인생들은 지금 영적 타향살이 중이다. 타향살이하는 외국인과 나그네의 삶은 고단하고 힘들다. 늘 고향을 그리워하기 마련이다. 만약 유월절을 지키지 않는다면 영원히 하늘 고향에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2013년 1월 22일 화요일

다수결 하나님의교회는 이단?



다수결의 오류



다수결은 의사결정을 하는 데 있어 다수의 의견을 따르는 방법이다. 서로간의 이익이 충돌하는 의사결정의 상황에서 다수의 이익을 위하는 것이 산술적으로 최대의 이익을 가져오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의사결정의 방법으로 널리 이용되고 있다.



그런데 신앙에 있어서도 다수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 최대 이익이라는 결과를 가져올까. 전혀 그렇지 않다. 사람은 육의 세계는 볼 수 있지만 영혼의 세계는 볼 수 없다. 육의 세계는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는 정보가 있지만 영혼의 세계에 대해서는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는 정보가 전혀 없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혼 세계에 대한 문제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다수결로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영혼 세계에 대해 가장 정확히 아는 이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가장 옳은 결정이다.






영혼 세계를 가장 잘 아는 분은 당연히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영혼 세계에 대한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절대적인 판단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오직 하나님만이 구원의 길을 알고 계신다는 것을 시인하고 순종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다수의 사람의 의견을 따르는 것을 옳게 여기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지키라고 말씀하셨는데, 대부분의 교회가 일요일을 지키고 있으니 안식일인 토요일에 예배를 드리는 교회는 이단이라고 한다. 성경에는 크리스마스를 지키라는 말씀도, 십자가를 세우라는 말씀도 없는데, 대부분의 교회가 그러니까 크리스마스를 지키지 않거나 십자가를 세우지 않으면 이단이라는 것이다.



이단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것은 어느 협회에서 규정하는 것도 아니고 다수결로 판단하는 것도 아니다.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규정되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행하는 것을 옳다고 여기는 것은 다수결의 원칙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습관일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의 교회 현실을 미리 내다보신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구원의 길은 좁고 멸망의 길은 넓다”고 하셨다.



명확한 기준인 하나님의 말씀, 성경이 있는데도 다수결로 이단을 판단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사람의 의견을 따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구원의 길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있다.







하나님의교회..장막터를 넓히다..대전 정림동 헌당예배~~

하나님의교회~~ 대전 정림동 헌당예배..


복음의 ‘큰 밭’인 대전(大田) 지역 성도들이 2013년 양력 새해 들어 첫 헌당예배의 기쁨을 누렸다. 1월 15일 저녁, 대전정림 하나님의 교회 헌당기념예배가 삼일 예배와 더불어 거행됐다. 

헌당식에는 대전의 인근 당회 성도들까지 약 1500명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 함께하신 어머니께서는 헌당의 축복과 제삼일의 축복을 아울러 내려주신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를 올리시고 대전정림교회가 알곡으로 가득한 시온이 되기를 기도해주셨다. 서로 화합하고 협력하여 아버지 하나님께 은혜로운 성전을 허락받은 성도들의 노고를 치하하시고, 먼저 된 식구들이 좋은 본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많은 영혼을 구원으로 인도할 일꾼을 많이 배출하기를 축복하셨다. 또한 대전 지역 모든 하나님의 교회가 알곡으로 가득하고 모든 성도들이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천국에 이를 수 있기를 바라시며 천국 소망으로 이 땅에서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항상 힘내자고 당부하셨다




총회장 김주철 목사는 설교를 통해, 초대교회가 육체로 오신 하나님을 바로 알고 영접하는 믿음의 반석 위에 세워졌으며 이 시대 인류 구원을 위해 성령과 신부로 임하신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을 믿는 교회가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생명이 있는 교회임을 강조했다(마 16장 16~19절, 계 22장 17절). 김주철 목사는 “천국 열쇠를 받은 성도들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열심히 영혼 구원하는 일에 힘써 대전 지역뿐 아니라 전 세계에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을 힘 있게 증거하자”고 권면했다. 




대전광역시 서구 정림동에 위치한 대전정림교회는 대전제2서구∙4서구∙3중구의 세 개 당회가 확장, 통합된 시온이다. 지하 1층, 지상 6층에 연면적 4,010제곱미터 규모의 성전은 대예배실, 소예배실, 교육관, 다목적 홀, 사무실, 식당 등 넓고 다양한 공간과 주차장을 갖췄다. 예전에 유명한 예식장이었던 곳이라 일부 성도들에게는 가정을 이룬 출발점이 되거나 집안 잔치 때 가족이 기쁨을 함께 나눈 소중한 추억의 장소이기도 하다. 

성도들은 이곳에 헌당의 축복을 주신 하나님께 깊이 감사드리며 “하나님께서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를 세워주셨으니 우리에게 생명수 주시는 성령과 신부를 열심히 자랑하여, 생명을 갈구하는 많은 사람들을 천국 혼인잔치에 초대하겠다”는 소망을 밝혔다. “크고 아름다운 성전을 허락하심은 빈 공간이 없도록 어서 속히 하늘 가족을 찾아 채우라는 뜻”이라 믿는 대전정림교회 성도들은, 내면의 모습까지도 아름답게 거듭나 주위의 많은 이들에게 천국 소망과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려 한마음으로 노력하고 있다. 





2013년 1월 21일 월요일

하나님의교회 영혼은?




샘이 죽은 후 몰리는 혼자였다. 잦아지는 그리움에 슬픔이 복받쳐도 위로해줄 사람이 없었다. 그와 함께했던 소파에 앉아 샘을 그리워하던 몰리에게 한 사람이 찾아왔다. 오다메였다. 그리고 몰리는 깨닫게 된다. 샘이 영혼의 상태로 자신의 주위를 맴돌고 있음을.



1990년, 전 세계적으로 대히트를 쳤던 영화 ‘사랑과 영혼(Ghost)’의 한 장면이다. 전반부의 안타까움이 절정에 다다를 즈음 이 장면에 이어 몰리는 결국 샘을 만나게 된다. 오다메 속에 들어온 샘의 영혼과의 재회는 보는 이의 노스탤지어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영화 '사랑과 영혼'의 한 장면

하지만 우리는 이 영화에서 차마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떠날 수 없었던 샘의 영혼이 던지는 메시지보다 ‘사람에게 과연 영혼이라는 것이 존재할까’라는 의문을 더 가지게 된다. 과연 영혼이라는 것은 존재할까. 영화에서 샘의 영혼은 몸을 벗어나 활동하며, 눈으로 볼 수 없고, 만질 수도 없는 존재로 설명된다. 물론 영화는 픽션(fiction)이다. 그러나 영화의 소재인 영혼은 논픽션(nonfiction)이다.



사람의 영혼에 대한 문제는 종교를 떠나 오랜 세월 회자되고 있다. 영혼 존재에 대한 갑론을박은 결론 없이 이어진다. 이유는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다’ 말할 수 없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 속에는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이 많다. 겨울이면 유행하는 인플루엔자, 동장군이 몰고 온 찬바람, 손바닥에 득실대는 세균들…. 인간이 가진 시력으로는 그 유무를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들의 존재를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는 이들의 존재를 증상이나 증거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인플루엔자의 증상은 열과 몸살, 기침 등이 있으며, 동장군이 몰고 온 찬바람 또한 피부로 그 증거를 체감할 수 있다. 손의 세균은 현미경을 통해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영혼의 존재는 어떤 증거로 확인할 수 있을까. 성경에서 그 해답을 살펴보자.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세기 2:7)



생령이란 ‘산 영혼’, ‘산 생명’이란 뜻이다. 흙이라는 육체 속에 하나님의 생기(영혼)로 사람이 창조됐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살아 있는 사람 모두에게는 영혼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영혼의 존재를 어떤 증거로 확인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의 명쾌한 답이다. 누구든지 살아 있다면 그것이 바로 영혼의 존재를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숨쉬고, 먹고, 움직이며 살아가는 모든 것, 그것이 바로 사람 속에 영혼이 존재한다는 증거다.

그렇다면 반대로 생각해보자. 사람의 몸속에 영혼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 (열왕기상 17:22)



이 내용은 엘리야라는 선지자가 사르밧 지역에 사는 한 과부를 만나 그의 죽은 아들을 살리는 장면이다. 이때 엘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 기도했다. ‘아이의 영혼을 몸으로 돌아오게 해달라’고 말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엘리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빠져나온 영혼을 몸으로 돌려보내 아이를 살아나게 하셨다. 즉 영혼이 몸과 분리되면 사람은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그 사람의 몸에 영혼이 없다는 것 자체가 죽었음을 의미한다. 이를 두고 성경에서는 ‘돌아간다’고 설명했다.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전도서 12:7)



‘돌아간다’는 의미는 ‘왔던 곳으로 다시 감’을 뜻한다. 예를 들어 아침에 집에서 나와 학교로 간 아이가 하교 후에 돌아간다면 어디로 갈까. 다시 집으로 가야 ‘돌아간다’는 말이 성립된다. 만약 아이가 하교 후 도서관에 들른다면 이는 ‘돌아간다’는 표현을 쓸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죽게 되면 몸과 영혼이 분리되어 ‘왔던 곳’으로 돌아간다고 하셨다. 육체는 흙에서 왔기에 땅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하나님으로부터 왔기에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영혼과 육체의 결합으로 살아 있던 사람은, 수명을 다한 후 영혼과 육체의 분리로 죽게 된다. 이와 관련해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표현하는 습관이 하나 있다. 예로부터 사람의 죽음에 대해 ‘돌아가셨다’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영혼은 아마도 육체가 의식하지 못하는, 삶과 죽음에 대한 메커니즘을 깨닫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몸을 보호하기 위해 인류는 옷을 지어 입기 시작했다. 옷은 유구한 역사 속에 변화를 거듭해 갔다. 그리고 명품이라는 브랜드 속에서 고가의 제품으로 태어나기도 했다. 그렇다고 몸보다 중요하지는 않다. 또한 옷이 아무리 비싸도 저절로 혼자 무엇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람이 벗어 놓으면 그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여지지 않는다. 우리의 몸이 이와 같다. 영혼에서 탈피된 육체는 아무것도 아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존재가 우리 몸이다. 벗어놓은 옷과 같다. 중요성을 논하자면 옷보다 몸이 중요하듯 육체보다 영혼이 더 중요하다는 결론이다.



영혼은 존재한다. 그 존재를 믿을지 말지는 각자에게 달렸다. ‘사랑과 영혼’의 몰리처럼 말이다.





2013년 1월 20일 일요일

하나님의 교회는 알고 있다 그날 밤 이집트의 기적을...









그날 밤 이집트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158 2010년 12월 17일, 북아프리카 튀니지의 작은 도시 시디부지드 시청 앞에서 과일노점상을 하던 청년 모하메드 부아지지가 분신을 시도했다. 23년간 튀니지를 독재해온 벤 알리 정권에 대한 저항이었다.



이 사건은 압제에 눌려 있던 시디부지드 지역의 시민들을 각성시켰다. 시민들은 부정부패로 얼룩진 정부를 규탄하며 들고일어났다. 부아지지가 사망하면서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됐다. 경찰과 시위대 간의 충돌로 희생자가 속출했다. 성난 시민봉기는 멈추지 않았다. 그로부터 한 달 후, 마침내 벤 알리 대통령은 권좌에서 물러나 사우디아라비아로 망명했다. 이른바 ‘재스민혁명’이다.



재스민혁명의 불씨는 자유가 메마른 땅으로 날아가 곳곳에서 불타올랐다. 이집트가 튀니지의 뒤를 이었다. 100만 명의 국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독재 타도를 외쳤다. 시위 이틀 사이 3명이 분신했다. 18일간의 시위 끝에 30년간 철권통치를 해오던 ‘현대판 파라오’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이 축출됐다. 18일간 3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이후 그 불씨가 옮겨붙은 인근 국가들에서 해묵은 갈등과 분노를 폭발한 민중들이 권력자의 아성을 무너뜨리려고 혈투를 벌였다.



민주주의가 뿌리내리기 전, 한국에서도 수차례 유혈사태가 있었다. 1960년 이승만 정권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었던 ‘4·19혁명’, 1980년 신군부 세력인 전두환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며 벌인 ‘5·18민주화운동’ 등이 그것이다. 그때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담보로 항쟁하며 죽어갔다.



지난 반세기 동안 자유와 인권의 상징인 민주국가 건설을 위해 목숨을 버린 예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자의든 타의든 유린당한 자는 피를 흘렸다. 억압과 압제는 자유를 갈망케 하고, 자유에 굶주린 군중들은 압제하는 자를 향해 저항한다. 이때 약한 자가 더 많이 죽는다. 지나간 역사의 법칙대로라면 자유는 결코 피의 대가 없이 허락되지 않는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학정을 일삼던 절대권력자에 단 한 번의 군중시위 없이, 단 한 사람의 희생 없이 자유를 얻어낸 민족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3,500년 전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민족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강자 쪽만 엄청난 희생을 당했다. 절대권력자는 그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나서야 무릎을 꿇었다. 대체 무엇이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고 절대권력자의 무릎을 꿇게 만들었을까.



“너희 이스라엘 자손은 어서 이곳을 떠나라. 너희의 원대로 가서 너희 하나님을 섬겨라. 너희가 요구한 대로 양과 소도 몰고 가라.” 고대 이집트 제18왕조 중의 한 사람으로 추정되는 파라오가 모세에게 소리쳤다. 야곱이 70명의 가솔들과 함께 이집트로 이주한 지 꼬박 430년이 되는 해였다. 파라오의 이 같은 언사는 돌연한 것이었다. 일찍이 이스라엘 민족은 파라오를 위해 국고성을 건축하는 일에 강제 동원됐다. 이집트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굴레 씌운 짐승처럼 잔인하게 학대하고 혹사시켰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처절한 고통 속에서 부르짖었고 그들의 절규는 하늘에 사무쳤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모세를 택하셨다. 모세는 파라오에게 이스라엘 민족을 내보낼 것을 요구했다. 파라오는 단호히 거절했다. 나일강이 피로 변하고 개구리 떼와 전염병이 창궐하는 등 아홉 차례에 걸쳐 재앙이 쏟아졌지만 해방을 승인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극단의 조치를 취하셨다.





... 이 달로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달이 되게 하고 ... 너희 매인이 어린양을 취할지니 ... 이 달 십사 일까지 간직하였다가 해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과 짐승을 무론하고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에게 벌을 내리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출애굽기 12:1~13)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역법(曆法)을 정해주시며 어린양을 잡아 유월절(逾越節)을 지키라고 명하셨다. 1월 14일 밤, 이스라엘 백성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집집마다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발랐다. 그리고 신을 신고 지팡이를 손에 쥔 채 서둘러 고기를 불에 구워 먹었다. 그날 밤 파라오는 자신의 금쪽같은 태자를 잃었고 이집트의 모든 장자가 죽음을 당했다. 오직 양의 피를 바른 집만 재앙을 면했다. 이집트 전역에는 전무후무한 큰 호곡으로 가득 찼다. 이 엄청난 희생을 치른 후에야 파라오는 이스라엘에 항복했다.



명과 암이 엇갈린 그 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질고의 땅에서의 마지막 밤이었다. 430년간의 노예생활을 청산하고 자유를 얻어낸 기념비적인 날이었다. 인권의식이 전무했던 그 시대, 노예해방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단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고 절대권력자의 무릎을 꿇게 만든 그 기적의 근원은 하나님의 약속 ‘유월절’이었다.